이제는 속도가 아닌 방향, 성장이 아닌 성숙
신지아를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롱 티보 콩쿠르 우승 직후였다. 고작 스물 한 살의 앳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그는 “만 세 살 때부터 밥 먹듯이 바이올린 연주만 했다”, “나태해지고 싶지 않아 하나의 콩쿠르가 끝나면 다음에 출전할 콩쿠르를 목표로 내걸었다”고 말했다.
프로필을 열람하자 14살 때부터의 콩쿠르 입상 경력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청소년 부문을 지나 성인 부문까지, 유럽 전역의 콩쿠르라는 콩쿠르에는 죄다 나가서 상을 따낸 것 같았다. 조금만 잘 한다 싶으면 대뜸 유학부터 준비하는 바이올린 전공자들 사이에서, 그는 드문 국내파였다. 게다가 쓸만한 악기를 갖지 못해 빌린 악기를 언니(바이올리니스트 신아라)랑 번갈아 쓰는 형편이었다. 그에게 콩쿠르는 자신의 실력을 검증할 수단이자 이름 석자를 알리고 연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정상에 도달할 듯 말 듯 2~3위를 맴돌던 신지아는 롱 티보 콩쿠르에서 드디어 ‘우승’ 타이틀을 거머쥔 뒤 후련해 보였다. 하지만 콩쿠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스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어릴 적부터 꿈꿨던 대회에서 자신의 성장기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욕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슬럼프가 덮쳐왔다. 한 번 정점을 찍은 뒤의 달리기는 더 이상 가속도가 나지 않았다. 냅다 뛸 줄만 알던 자신에 대한 성찰이 뒤늦게 그를 붙잡아 세웠다. ‘콩쿠르 우승자가 얼마나 잘 하나 보자’며 실눈을 뜬 시선들도 부담스러웠다. 잠을 못 이루는 날, 악기를 끌어 안고 우는 날이 많았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콩쿠르 결과에 대한 두려움으로 현재의 연주에 대한 즐거움도 잃어버렸다. ‘이런 게 행복한 삶인가’ 하는 회의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콩쿠르에 도전하며 자신을 한 단계씩 뛰어 넘었던 것을 상기하며 마지막으로 대회에 임했다. 결승 심사에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남김 없이 쏟아 부었다. 결과는 3위. 단순히 우승이 목표였다면 실패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성공이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했기에, 십 수 년간 짊어졌던 무거운 짐 가방을 내려 놓듯 미련 없이 콩쿠르와 작별했다.
이제 더 이상 경쟁의 틀에 자신의 음악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달리던 속도를 늦추고 얼마든지 방향을 바꿔도 괜찮았다. 그는 본격적인 글로벌 무대 진출을 위해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본명 신현수 대신 신지아라는 예명을 짓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음악가로서 성장기를 마치고 성숙기에 발을 디뎠다. 이제 그의 목표는 청중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바이올리니스트를 넘어 예술가가 되기 위해 경험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무렵 디토 페스티벌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그는 2013년 시즌 <시티 오브 바흐> 때 ‘격정 바흐’라는 타이틀을 걸고 디토 오케스트라와 함께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연주했다. 콩쿠르 킬러였던 그의 주요 레퍼토리와는 다른 음악이었다. 그는 뜨겁고 화려한 자신의 개성을 거침 없이 바흐의 음악에 입혔다. 객석의 호응은 열렬했다. 다음 해에는 ‘칸토 안티고’라는 타이틀을 건 라틴 포크송과 탱고 리사이틀로 대중적인 친밀감을 높였다.
“가능한 가리지 않고 모든 음악을 다 연주하고 싶어요. 더 많은 분들에게 들려주고 싶고요. 청중의 집중력을 끌어 당기기 위해서는 장르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통 클래식이냐 아니냐, 독주냐 실내악이냐는 제한에서 자유롭고 싶어요.”
신지아는 올 시즌 ‘슈베르티아데’에 다시 합류했다. 앙상블 디토 멤버들과는 함께 하지 않는, 자신만의 리사이틀이지만 페스티벌의 성격에 걸맞게 재미있고 신선한 시도를 보여준다.
1부는 우리 귀에 친숙한 슈베르트의 가곡들을 현악사중주와 독주 바이올린의 ‘4 +1‘ 형태로 편곡해 연주한다.
그는 “가곡을 편곡해서 연주하는 것은, 슈베르트의 음악 중 바이올린 레퍼토리가 적어서이기도 하지만, 가곡이 가장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그저 감미롭게만 들리지 않게, 슬픔과 기쁨, 격정 등 여러 정서가 조화를 이루도록 구성했다”고 말했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듣기에는 그저 예쁘고 단순해 보이지만, 연주하는 입장에서는 까다로워요. 세세한 표현들이 어려운데다가 자칫 밋밋해지기 쉬워요. 작곡가 자신의 개성이 강해 거기에 연주자의 색깔을 입히기도 만만치 않죠. 그 동안 두드러지는 음악 위주로 연주했던 제게 큰 공부가 되고 있어요.”
2부에서는 슈베르트의 정통 바이올린 레퍼토리를 선사한다. 가곡 ‘방랑자’(D.489)의 주제를 도입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장조 ‘방랑자’(D.934)>를 선곡해 1부의 가곡 레퍼토리들과 교묘하게 연결한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그는 공연을 목전에 둔 요즘 이 곡의 리허설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쉼 없이 이어지면서 숨 죽여 듣게 만드는 곡이에요. 미세한 잡음까지 전달되는 챔버홀에서 연주하려니 기술적인 부담이 되어서 더 많이 연습하고 있어요. 슈베르트적인 아름다움을, 신지아만의 스타일로 느끼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글_김소민 (음악 칼럼니스트)
[2015 DITTO]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 '세레나데'http://bit.ly/1ICVQEU
2015. 6. 13(토) 오후 8시 예술의전당 IBK챔버홀